인터뷰 = 허민 사회부장 (문화일보 , 2009년 7월 1일 수요일)
“저는 제가 처했던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저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망을 가져라’고 말하는 대신 과학자로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제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곤 합니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47·사진)교수. 지난 2006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 한가운데서 지질조사 중 차가 뒤집히는 사고로 목 아랫부분이 모두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사람들은 과학자로서의 그의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6개월 만에 학교에 복귀했다.
실의에 빠져 있는 이 교수에게 기적을 가져다 준 계기는 몸 담고 있던 서울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다. 공과대 기계항공공학부 이건우 교수가 경암교육문화재단의 학술상 부상으로 받은 1억원을 이상묵 교수에게 기부하겠다는 내용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 자신이 받은 상금을 나에게 전부 기부했습니다. 사고가 난 후 3개월이 지난 2006년 10월의 일입니다.” 이 교수는 “그분의 기부가 있은 뒤 저는 다시 강단에 서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2007년 1월 학교로 돌아왔고 그의 기적과 같은 재기 소식은 차츰 언론 매체들을 통해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암교육문화재단은 이건우 교수의 선행을 알고 서울대에 장애인 의료장비 개발 센터 설립 명목으로 또 다시 1억원을 쾌척했다. 이것이 씨앗돈이 돼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원 ‘보조재활공학센터(CARE)’가 만들어졌다. 센터 설립을 위해 경기도가 땅을 내줬다. 이 교수는 오는 2010년부터는 지식경제부의 후원으로 장애인을 위한 100억원대 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제가 실의에 잠겨 있을 때 생판 모르는 분의 기부에 의해 재기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고 결국은 100억원 규모의 프런티어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또 서울대가 장애인을 위한 사업에 앞장설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거죠.” 이 교수는 “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 모든 과정이 기적처럼 일어났고 ‘하늘이 짠 각본’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사고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난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는 ‘비우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채워나갈 과제가 생기니까요. 일반사람들은 채워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과학자는 비워져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교수는 단 한 번도 죽은 신경을 살리기 위한 치료에 매달렸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다친 후에도 “나는 참 ‘러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되뇌였을 정도였다. 이 교수는 “이건 삶의 방향 전환이지 불행의 시작이 아니라고 제 자신에게 주문처럼 말했다”고 털어놨다. “다치더라도 할 수 있는 직업이 교수 아닙니까. 제가 발레리나 혹은 피아니스트였다면 그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을 때려가며 가르쳐야 할 텐데 때리지도 못하니 말을 잘 듣겠습니까.”(웃음)
어쩌면 이 같은 긍정의 힘이 그가 강조하는 기적을 가능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죽은 신경을 위한 치료 대신 과학자로서의 직업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에 힘썼다. 이 교수는 빨대에 입김을 불어넣어 작동하는 마우스를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고 세상과 소통한다. 머리를 움직여 전동휠체어를 작동시키고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의자의 각도를 높였다 낮추는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확실히 그의 재기엔 정보기술(IT)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를 살린 것은 줄기세포가 아니라 정보기술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것은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교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줄기세포도 솔루션이고, IT도 솔루션”이라고 몇번이나 강조했다.
이 교수는 ‘0.1그램의 희망’(랜덤하우스코리아)이란 책의 저자다. 출판사쪽에서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경험담을 써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정작 희망이란 단어는 찾기 힘들다. “작가 장정일씨가 책을 읽고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와 하는 말이 ‘이 책은 장애 극복기가 아니라 과학이란 직업 소개서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과학자를 위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지침서라는 것이죠.”
이 교수는 “절망에 빠진 과거와 힘든 현재를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써달라고 주문받았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과학에 대해 얘기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솔직히 희망을 얘기하기엔 난 너무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그런 면에서는 희망 전도사라기보다는 과학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금 이 교수에게는 ‘한국의 스티븐 호킹’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저나 호킹 박사나 관측하는 것이 일입니다. 호킹은 우주를, 저는 바다를 관측하죠. 다른 게 있다면 호킹 박사는 ‘시간의 역사’라는 책을 써서 무려 700만파운드나 벌었지만 저는 ‘0.1g의 희망’을 써서 수익금을 6000만원밖에 올리지 못했다는 겁니다.”(웃음)
이 교수는 그러나 “호킹 박사는 대 물리학자이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자리를 이어받아 케임브리지대 루카시언 석좌교수가 된 분”이라며 “나를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러주는 것은 과분한 평가”라고 겸손해 했다.
이 교수는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벌일 태평양·남극 중앙해령 탐사에도 주요 연구자로 참여한다. 그는 중앙해령으로 불리는 심해 활화산 산맥을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전문가다. 국내에서 중앙해령을 공부한 지구물리학자도 이 교수가 유일하다.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에 돈은 안될 것 같았지만 너무 흥미로워 빠져든 게 중앙해령 연구였다고 한다. 화산과 지진을 연구하는 그에게 화산 터지는 곳이 바로 자신의 놀이터인 셈이다.
이 교수에게는 과학이 중요한 것만큼 과학윤리 혹은 과학철학 또한 중요하다. “과학은 필요한 사항에 대해 절대적인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인생은, 사랑은,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이런 것들에 대해 과학은 답을 하지 않죠.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이 교수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사로 버트런드 러셀을 꼽았다. 가장 좋아하는 책도 러셀의 ‘서양철학사’였다. “인간은 과학과 종교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처해 있고, 그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이라고 한 러셀의 말에 동의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과학철학에 대한 의지는 이 교수에게 과학자로서의 바른 자세를 요구한다. 그는 “철학을 갖지 않으면 과학은 입신양명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지금 ‘바다의 탐구’라는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 지구과학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취지로 쓰고 있다고 한다. 궁극적인 희망을 묻자 “과학자로서 성공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롤 모델’을 만들겠다는 답변도 함께 돌아왔다. 서울대에 장애인 직업 교육을 위한 프로젝트 ROPOS(Realizing Our Potential in Science)를 추진하는 것도 그런 취지다.
이 교수는 사고 후에 일어났던 이 모든 것을 ‘기적’과 ‘행운’ 때문으로 돌렸다. 하지만 기적은 한 사람의 기부로 시작됐으며, 그가 말하는 행운이란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그는 부인하지 않는다. 학교로 돌아온 자신에게 언젠가 후배 여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배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게 기적이야.” 이 교수는 “정말로 과학할 맛이 난다”면서 “과학자로서의 삶도, 영광도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눌 준비가 돼 있다”고 환하게 웃었다.
minski@munhwa.com
■ 이상묵 교수는…
서울대 해양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대와 세계 최대 민간해양연구소인 우즈홀 공동박사학위과정에서 학위를 받았다. 2003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임명된 후 2006년 7월 미 캘리포니아 지질 연구 도중 교통사고로 목뼈를 심하게 다쳐 목 아래 감각과 운동신경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사고 6개월 만인 2007년 1월 강단에 복귀했다.
그는 인체기능 상당 부분을 잃은 것에 대해 “안 쓰는 물건을 내다 파는 ‘창고 세일’을 했다”고 표현했다. 과학자로서 필요한 것은 가슴과 머리라면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팔다리를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구의 생성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어 열정(가슴)과 생각(머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이 교수는 사고 이후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철학과 인생관을 담은 자서전 ‘0.1그램의 희망’을 출간해 화제를 모았고, 책 판매 수입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정부로부터 장애인 정보격차해소 홍보대사로 임명됐고, 미 샌프란시스코 시의회가 해양지구 물리학 발전과 장애인 복지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주는 특별공로상(BSA)도 받았다.
기사 게재 일자 2009-07-01
